본문 바로가기

한국사(자격증)/일제강점기

2. 무장투쟁 계열

2. 무장투쟁 계열

 

🔥 무장투쟁 계열 항일운동: 총과 피로 지킨 독립의 꿈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 말과 글은 통제당하고, 법과 제도는 일제의 수탈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절망이 짙게 드리운 이 시절, 조선의 청년들은 총을 들었습니다. 말로는 지켜지지 않는 독립이라면, 싸워서라도 되찾겠다는 각오였죠. 무장투쟁 항일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191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진 무장 항일운동의 흐름과 주요 인물, 전투, 그리고 그 정신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 만주와 간도로 떠난 독립군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국내에서의 무장저항은 의병을 중심으로 벌어졌지만,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대부분 와해됐습니다. 그러나 의병의 정신은 국경 너머 만주와 연해주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워,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 재편

3·1운동은 비폭력 저항이었지만, 그 참혹한 탄압은 조선 청년들에게 다른 길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독립군 조직들이 재정비됩니다.

  • 대한독립군 (홍범도)
  • 북로군정서군 (김좌진)
  • 대한국민회군, 신민단, 서로군정서, 의열단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무장 게릴라 전투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 독립군 전성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주축이 되어, 일본군 정예 부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 조선 독립군 연합이 매복 작전으로 일본군을 크게 격파
  • 조선 민중에게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줌
  • 일본은 이 전투 패배 이후 보복적으로 대규모 토벌을 시도

📍 청산리 대첩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 3천 명 이상과 10여 차례에 걸친 격전을 벌인 사건입니다.

  •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독립군이 지형과 전략을 활용해 대승
  • 일본군 1천여 명 이상 전사
  •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상 가장 큰 전투, 전설처럼 기억됨

💡 이 두 전투는 조선인의 무장 투쟁이 ‘현실적 힘’을 가졌다는 상징이 되었고, 일제의 만주 정책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도시 게릴라, 의열단의 등장

한편, 국내와 상하이 등지에서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폭탄을 들고 나선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의열단(義烈團)**입니다.

  • 1919년 김원봉, 윤세주 등이 조직
  • 목표: “일제를 대표하는 인물, 기관, 상징을 직접 타격”
  • 무정부주의·사회주의적 경향과 연결

주요 의열투쟁 사건

사건인물내용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1921) 김익상 일본 식민 통치의 상징에 대한 공격
부산경찰서 투탄 (1920) 박재혁 체포 후 재판 중 자결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1932) 윤봉길 일본군 고관 다수 사살, 세계적 충격
 

특히 윤봉길 의거는 중국의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며, 국제 외교에서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 독립군의 위기와 통합 노력

1920년대 후반부터 독립군은 일본의 대대적 탄압, 군자금 부족, 조직 분열 등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단일 무장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하게 되죠.

  • 3부 통합운동: 서로군정서, 정의부, 신민부 통합 시도
  • 민족유일당 운동: 이념 차이를 넘은 통합 노력 (신간회 등)

하지만 내외부 갈등과 소련의 독립군 무장해제 사건(자유시 참변, 1921) 등으로 통합은 지속되지 못했고, 조직은 약화됩니다.


🛡️ 광복을 향한 마지막 무장전선: 한국광복군

1930년대 후반, 일본은 중국 침략과 함께 본격적인 전쟁 체제로 들어섭니다. 조선도 전시 체제에 편입되며 강제징용, 학도병, 정신대 등이 발생합니다.

이에 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합니다.

  • 총사령관: 지청천
  • 주요 인물: 김구, 이범석, 김원봉
  • 1941년 연합국 편에 서서 대일 선전포고
  • 미군 OSS와 협력하여 국내 진공 작전도 계획 (실행 전 광복)

🧠 정리하며: 잊혀선 안 될 피의 역사

무장 항일운동은 결코 규모가 크고 정규전처럼 조직된 경우만 있진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변변한 무기도 없이 달려들었고, 어떤 이는 목숨을 담보로 폭탄을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국경을 넘어 평생을 떠돌았고, 누군가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 없는 희생이 있었기에, 독립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마침내 1945년 해방의 순간이 가능했습니다.


📌 다음 글 예고
제3화: 민족 말살 정책과 전시 동원, 그리고 광복의 순간 (1931~1945)
총칼보다 무서운 ‘정신의 식민화’, 그리고 끝내 지켜낸 민족의 의지를 조명합니다.